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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MLB 수다

The Ringer: 리키 헨더슨, 과장이 필요없는 야구 영웅

by 그리핑 2024. 12. 23.

더 링거 필자 벤 린드버그의 칼럼 "리키 헨더슨, 과장이 필요없는 야구 영웅"입니다.

https://www.theringer.com/2024/12/22/mlb/rickey-henderson-obituary-mlb-leadoff-man-stolen-bases-oakland-athletics

야구 팬으로 자라다 보면, 자신의 생일에 태어난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유명 선수와 생일을 공유하는 것은 자부심의 원천이다. 그들의 영광이 자신에게도 일부 반영된다고 믿거나, 자신 또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나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친구들은 내가 예수와 같은 생일이라며 농담을 했지만, 예수는 사실 12월 25일에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리키 헨더슨은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아이였고,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올해 크리스마스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면서, 더 이상 리키도 어딘가에서 촛불을 끄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어떤 선수보다도 밝게 빛났던 헨더슨은 지난 금요일, 66세를 며칠 앞두고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라운드에서 그는 완벽한 타이밍을 보여줬지만, 인생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야구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도 전에 등장했고, 너무 일찍 떠나버렸다. 오늘날 그가 등장했다면 당시보다 더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야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헨더슨의 "시대"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의 선수 수명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는 28세였지만, 2005년 샌디에이고 서프도그스(골든 베이스볼 리그)에서 마지막 프로 경기를 치를 때까지 현역으로 뛰었고, 그때 나는 막 대학에 입학했다. 서프도그스 시절에도 그는 평균 20살은 어린 독립리그 선수들을 상대로 18번의 도루 시도 중 16번을 성공시켰다.

MLB 커미셔너 롭 맨프레드는 성명을 통해 "리키는 스포츠 팬들로부터 보편적인 존경과 찬사, 경외심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이는 리키 자신에게는 낯선 소리였을 것이다. 1999년 MLB '20세기 베스트 팀' 투표에서 그는 외야수 중 17위에 그쳤다. 그 당시 헨더슨이 1998년 12번째 도루왕을 차지했고, 1999년 40세의 나이에도 메츠에서 121경기 동안 타율 0.315, 출루율 0.423, 장타율 0.466에 37도루를 기록하는 활약을 펼쳤음에도 말이다.

ESPN의 짐 케이플은 2001년 "리키는 20년 동안 야구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핫도그'였다"며 그의 거만해 보이는 태도와 열정이 부족해 보인다는 평가가 "팬들을 멀어지게 했다"고 지적했다. 리키는 자신과 18위에 오른 배리 본즈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지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미뤄뒀던 평가를 해주자. 헨더슨의 야구 영웅은 윌리 메이스였다. 그는 9개 메이저리그 팀에서 뛰면서 마지막 두 팀을 제외하고는 모두 메이스의 24번을 달았다. 올해 6월 윌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현존하는 최고의 선수'라는 타이틀의 계승자에 대해 논했다. 본즈, 로저 클레멘스,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통계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후보였지만, 이들은 모두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클린한 것으로 여겨지는' 범주에서는 단 한 명의 선택지만 남았다: 리키 헨더슨이었다. 그가 이 영예를 단 6개월만 누렸다는 것이 안타깝다.

헨더슨은 제8계명(도둑질하지 말라)을 가장 많이 위반한 선수로 유명하다. 그의 1,406도루 기록은 MLB가 아무리 도루하기 쉽게 규칙을 바꾸더라도, 사이 영의 511승만큼이나 깨지기 힘든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1982년 그는 130도루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고, 톰 보스웰은 "리키가 야구장의 기본 치수에 도전하고 있다"고 감탄했다. 통산 도루 2위인 루 브록과 헨더슨의 격차는 브록과 46위 지미 롤린스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하지만 이것이 헨더슨의 도루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통계는 아니다. 30세 이전 통산 도루 1위 선수와 30세 이후 통산 도루 1위 선수 목록 양쪽 모두에서 1위를 차지한 선수는 헨더슨이 유일하다.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초반에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급격히 속도가 떨어지거나(잦은 슬라이딩으로 인한 부상 때문일 수 있음), 아니면 출루 능력이나 슬라이딩 기술을 연마하는 데 시간이 걸려 늦게 개화한다. 그러나 '맨 오브 스틸'은 두 연령대 모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62년 모리 윌스는 104도루를 기록한 뒤 "다시는 이런 기록에 근접하지 못할 것 같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리키는 4년 동안 세 번이나 100도루를 달성했다.

관련해서, 리키는 통산 2,295득점으로 최다 득점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득점은 그의 장타력이나 실제 주루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스스로를 '혼돈의 창조자'라고 칭한 그는 베이브 루스의 통산 볼넷 기록도 깼다. 이후 PED(경기력향상 금지약물) 논란의 본즈에게 기록을 넘겨주긴 했지만, 고의볼넷을 제외한 최다 기록은 여전히 헨더슨이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볼넷 덕분에 그는 메이저리그 25년 동안 출루율 0.401을 기록했다(모든 프로 경기를 포함하면 30년 동안 0.409).

시즌별 기록들을 한 화면에서 모두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출루율 뒤에 숨은 진정한 가치를 놓칠 수 있다. 다른 최정상급 선수들과 비교하거나 그의 스타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살펴볼 때 헨더슨은 더욱 놀라워 보인다. 빌 제임스는 2001년 '새로운 야구사 개요'에서 "만약 그를 둘로 나눌 수 있다면, 두 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가 될 것"이라고 썼다. 몸이 둘로 나뉘는 해부학적 단점을 제외하면, 이는 전적으로 사실이다. 헨더슨을 제외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 172명 중 니그로 리그에서 주로 뛰지 않은 타자들의 평균 WAR은 61.8을 기록했는데, 이는 헨더슨 WAR의 절반보다 겨우 6 정도 높은 수준이다. 그의 111.1 WAR를 둘로 나누면, 각각의 '반쪽 헨더슨'도 72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들의 WAR를 넘어선다.

헨더슨의 쿠퍼스타운(명예의 전당) 자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은 그의 가장 큰 특징인 도루를 빼고 평가해보는 것이다. 베이스에서 그가 일으킨 혼란은 야구 전설에 가장 큰 기여를 했지만, 팀의 승리에 대한 기여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타석에서의 그의 활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타격은 주루쇼의 전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메인 이벤트였다. 2013년 헨더슨은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그렇게 도루를 많이 할 수 있었나요?'라고 묻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이 출루할 수 있었나요?'라고는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리키는 베이스에 발을 딛기도 전에 이미 공격력의 화신이었다. 그의 첫 풀타임 시즌부터 전성기가 끝나는 1993년(34세)까지, 그는 프랭크 토마스, 마이크 슈미트, 본즈, 프레드 맥그리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뛰어난 타자였다(wRC+ 145). 타석에서의 활약만으로도 그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리키는 통산 타격 득점 기여도(주루 득점 기여도와는 별개)에서 32위를 기록했다. 그보다 높은 순위의 선수 중 명예의 전당에 없는 선수는 7명뿐인데, 이들은 모두 자격이 아직 안 되거나(알버트 푸홀스, 마이크 트라웃, 미구엘 카브레라) PED 관련으로 제외된 선수들(본즈, 매니 라미레스, 로드리게스, 게리 셰필드)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리키가 원래는 왼손잡이지만 우타자로 타격했다는 것이다. 만약 좌타자로 타격했다면 플래툰 이점을 더 많이 누렸을 것이다. (그의 우투수 상대 OPS가 좌투수 상대보다 74포인트 낮았고, 우투수를 상대할 기회가 두 배 이상 많았다.)

리키의 공격의 기반은 볼넷(삼진보다 훨씬 많았다)이었지만, 결코 단순한 컨택 히터가 아니었다. 그는 본즈에 이어 통산 파워-스피드 넘버 2위를 기록했다. 이는 빌 제임스가 만든 지표로, 홈런과 도루의 수와 그 밸런스를 평가한다. 리키의 높은 순위엔 도루가 크게 기여했지만, 297홈런도 한몫했다. 1980년부터 1993년까지의 전성기 동안, 그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는 31명뿐이었다. 더구나 홈런을 치기 어려운 오클랜드의 홈구장에서 대부분의 경기를 치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300홈런이라는 통계적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더 유리한 타격 환경이었다면 쉽게 달성했을 것이다. 실제로 리키는 원정에서 홈보다 27개 더 많은 홈런을 기록했다.

투수들이 그에게 볼넷을 주면 곧 2루나 3루를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토록 많은 볼넷을 얻어낸 것은 그의 뛰어난 선구안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장타력 덕분이기도 했다. 이 파워가 없었다면 투수들은 더 과감하게 승부했을 것이고, 아무리 좋은 선구안을 가졌더라도 그만큼의 볼넷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모든 무기는 수비수들의 악몽이 되기 위해 조화롭게 작동했다. 파워는 투수들을 조심스럽게 만들었고, 선구안은 볼을 고르게 했으며, 일단 출루하면 본능과 스피드가 발휘됐다.

여전히 통계만으로는 리키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비행기 착륙을 연상시키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그로 인해 더 이상 깨끗할 수 없었던 유니폼, 스트라이크 존을 "히틀러의 심장보다 작게" 만든(짐 머레이의 표현) 크라우치 스탠스, 잔디의 녹색을 부끄럽게 만드는 배팅 장갑, 그만의 독특한 포구 스타일, 작지만 탄탄한 체격, 오클랜드의 홈타운 영웅이라는 위상,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습관, 그리고 너무 재미있어서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운(하지만 일부는 실제로 있었던) 수많은 일화들까지.

이처럼 독특한 스타일과 특출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면 오히려 과대평가되기 쉬웠을 것이다. (도루는 실제 가치보다 더 화려해 보이고, 리키도 기록적인 335개의 도루 실패를 기록했다 - 물론 시간이 갈수록 실패율은 낮아졌다.) 하지만 리키는 리키 자신조차도 과대평가할 수 없을 만큼 위대했다. 대부분의 관찰자들에게 그는 오히려 과소평가됐고, 20세기 베스트 팀 제외는 그 증거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25시즌 동안 활약하며 14번의 시즌에서 4.5 WAR 이상을 기록했음에도 올스타에는 10번밖에 선정되지 못했다. 그 25년 동안 본즈만이 리키보다 더 높은 WAR를 기록했지만, 9명의 타자가 리키보다 많은 올스타 선정 횟수를 기록했다. (칼 립켄 주니어는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여러 번 선정되며 총 19번의 올스타에 선정됐고, 리키나 립켄보다 가치가 낮은 그윈도 15번이나 선정됐다.)

리키는 아메리칸리그 좌익수 수비 부문에서 5차례, 중견수 부문에서 1차례 필딩 런스 1위에 올랐지만 골드글러브는 단 한 번만 받았다. MVP도 1990년 한 차례만 수상했는데, 8.5 WAR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네 번이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은 숫자다. 1980년에는 조지 브렛에 이어 아메리칸리그 WAR 2위를 기록했지만 MVP 투표 10위에 그쳤고, 1985년에는 아메리칸리그 WAR 1위였음에도 3위, 1989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야수 중 가장 높은 WAR를 기록했지만 9위에 머물렀다. 게다가 그는 약체 팀에서만 뛴 것도 아니었다. 전성기에 5번, 전체적으로 8번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2005년 독립리그팀 서프도그스의 우승은 제외), 전반적으로 포스트시즌 성적이 정규시즌보다 더 좋았다.

물론 1980-90년대에는 WAR을 살펴보는 사람이 없었고, 볼넷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리키의 마지막 메이저리그 시즌에 '머니볼'이 출간됐고, 그 이듬해부터 출루율이 타율보다 선수의 재계약 가능성을 더 잘 예측하게 됐다.) 하지만 리키는 대중, 언론, 때로는 감독이나 동료들과도 불화를 겪었다. 때때로 그의 의도는 잘못 해석됐다. 브록의 기록을 깨고 자신을 "역사상 최고"라고 선언했을 때가 대표적인 예다.

구체적으로 "역사상 최고의 베이스 스틸러"라고 말했고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자신을 칭찬하기 전에 신과 팬들, 어머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브록을 "위대한 도루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담담한 선언은 여전히 오만의 극치로 여겨졌다. 그의 아내가 기억하는 "겸손한 영혼"을 그의 거만한 태도 뒤에서 발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욱 황당한 점은 헨더슨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의심하는 시선이었다. 은퇴를 거부하고 끝까지 야구를 붙잡고 있었던 선수를 두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이 또한 자존심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기량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통산 4위의 경기 출전수와 타석수를 기록한 선수를 두고 노력이 부족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2011년 그는 "이따금 야구를 보다가 게임이 막히는 걸 보면서 '내가 나가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며 "그건 아마도 내가 야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종차별, 그의 높은 연봉에 대한 반감, 그리고 야구를 너무 쉽게 해내는 듯한 모습이 그의 인기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커리어에서 벌어진 논란들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헨더슨과 동시대를 함께한 많은 야구 아이콘들의 이력에는 가정폭력, 음주운전, 다양한 형태의 부정행위 등 오점이 남아있다. 이에 비해 리키의 '큰소리치기' 정도가 무슨 대단한 문제였을까? 그의 위키피디아 '사생활' 섹션에는 죽음 관련 내용을 제외하면 단 두 문장만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의 연인과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는 것뿐이다.

사실을 직시해보자. 미식축구가 리키의 첫사랑이었고, NFL의 성장과 MLB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 감소를 고려하면, 2020년대의 리키라면 아마도 미식축구장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환생한 리키'가 야구를 계속했다면, 그는 아마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의 자화자찬과 홈런 세리머니가 진정성 있고 재미있는 감정 표현으로 여겨졌을 것이고, 휴식일은 부상 관리의 관점에서 이해됐을 것이며, 계약 협상은 노동자 권리에 더 우호적인 팬들과 미디어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의 종합적인 가치는 수치화되어 인정받았을 것이고, 그의 자잘한 친절한 행동들도 더 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마이크 피아자의 자서전에 나오는 유명한 "풀 셰어!" 일화를 누군가 언급할 때마다 터져 나오는 바이럴 반응을 보라.

오늘날 어떤 팀도 80년대처럼 리키가 마음껏 뛰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다른 면에선 현대 야구에 완벽히 어울렸을 것이다. 그가 세운 81개의 선두타자 홈런 기록은 리드오프 타자에게 더 많은 파워와 생산성을 요구하는 리그 전반의 변화를 예고했다. 조지 스프링어, 무키 베츠, 카일 슈워버,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 중 누군가가 이 기록을 깰 수 있을지 모르지만, 82번째 홈런을 치는 선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헨더슨에게 경의를 표하는 셈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야구에 파워는 많지만, 리키가 자랑했던 다른 재능들은 점점 더 희소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팀 레인스, 빈스 콜먼, 윌리 윌슨에 대한 존중은 있지만, 리키야말로 MLB가 다시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높은 컨택율과 스피드를 겸비한 선수의 원형이다.

MLB 커미셔너 맨프레드는 최근 새 규칙을 고려할 때 "리키 헨더슨 시대"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고, 프로모션에서는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아지 같이 수비하고, 리키처럼 뛰어라"라고 말했다.

새 규칙에 대해 리키는 "게임을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며 투덜댔고, 우스꽝스럽게도 "그럼 내 기록에 50~60 더 추가해야 해. 그게 새 규칙이야"라고 말했다. 연간 도루 횟수를 말하는 건지 총 도루 횟수를 말하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리키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아마도 후자였을 거다.

잔인하게도 오클랜드 팬들은 리키 헨더슨 필드에서 리키와 애슬레틱스 경기를 모두 잃었다. 리키는 지난 10월 말, 늘 그렇듯 선수 시절 체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그 구장에 섰다. 그는 "이 필드에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떤 규칙 변경도 리키의 완벽한 복제품을 만들어낼 순 없다. 이제 원조는 떠나버렸지만, 그는 우리에게 수많은 하이라이트를 남겼다. 그가 바랐을 법한 건, "와, 쟤 정말 대단했네"라고 생각하며 그의 플레이를 보는 것이다.

"베이스를 훔치려면 자신이 무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헨더슨은 말했다. 리키는 분명 스스로를 무적이라 믿었고, 지난 금요일까지는 우리도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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